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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낙엽처럼/2007

생태찌개

by 서 련 2007.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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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세어라! 개똥아!
조회(287)
Memory of the day 2007/01/30 (화)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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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없이 출근하던 남편의 뒷모습이 목구멍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마음 한켠에 걸려있던 오후.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남편 기분을 좀 풀어 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오늘 저녁에 일찍 들어 올거지?"
"응. 근데 무슨 일 있어?"
"그냥... 생태찌개 끓여서 소주한잔 할까 해서..."
"어이구 우리 마누라가 웬일이셔? 알았어. 곧장 들어 갈게"
전화를 끊고 그 길로 시장에 들렀다.
찌개에 들어갈 생태 커다란 것 한 마리, 두부 한모, 대파 한단, 무 하나, 마늘을 사고
소주랑 야채 몇가지를 더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전골 냄비에 무를 깔고 손질한 생태 토막과 두부를 담고
파채를 올린 다음 멸치다시국물을 붓고 양념을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찌개가 부글부글 끓으며 높이 쌓은 파채가 뜨거운 열기에 허물어지고
생태가 익어갈 무렵 남편이 왔다.
"아빠 다녀 오셨어요?"
"응, 예진이도 유치원 잘 다녀왔어? 일루와봐 아빠가 안아줄게"
부녀의 진한 상봉이 끝나고 나서야 나는 남편과 겸상을 하면서 술잔을 기울일수 있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술상을 다봤데?"
"응, 그냥... 저기... 자기가 힘들어 하는 것 같아서 기운 좀 내라고..."
보글보글 끓어 오르는 생태찌개 너머로 남편의 웃는 얼굴이 보인다.
그리고 그의 눈언저리에 엷게 퍼진 주름살도 보인다.
'어느 새 주름 살이...'
눈꼬리 옆으로 가늘게 퍼져있는 주름살이 그의 인상을 더 부드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의 주름살...
나는 그 주름살을 보면서 그 어떤 편안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팽팽하던 그의 눈가에 저렇게 많은 주름살이 생길때까지
나는 고집스럽게도 그의 불안을 나 몰라라 했었던 것 같다.
나는 이제껏 참 나쁜 마누라였나 보다.
 
그 생각을 하니 괜히 쓸데 없이 눈물이 맺히는 거다.
그래서 고개를 텔레비젼 쪽으로 돌렸다.
"TV는 사랑을 싣고" 에서 박세민이 어릴적 짝사랑을 찾고 있었다.
그걸 보던 남편은 자신이 어릴적 짝사랑하던 여동창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 애한테 차마 좋아한다는 얘기는 못 꺼내고 맨날 괴롭히고 다녔다는 말을 했다.
 
"뭘 어떻게 괴롭혔길래?"
"뭐 머슴애들이 다 그렇치 뭐. 고무줄도 끊고, 지나가다 머리도 한번 잡아 당겨도 보고...
어느 날 그 애한테 아이스께끼를 하려고 치마를 확 들쳤는데...
글쎄 팬티에 빵구가 나있는 거야. 그 얘기를 친구놈들한테 하고는 그 애를 얼마나 놀려 댔던지...
근데 얼마전에 동창회에서 그 친구를 만났었는데
나 때문에 학교 다니기 정말 싫었다고 하드라."
그의 눈이 장난끼로 반짝였다.
"하여간 그때는 쑥스러워서 좋아한다는 말도 못하고 주구장창 괴롭히기만 했으니까..."
그러면서 남편은 내 짝사랑 이야기도 해 달라고 했다.
 
"난 어릴때 되게 못됐었어. 얼마나 쌀쌀맞게 굴었는지 남자애들이 옆에 잘 안왔지.
지금 생각해보니 나를 짝사랑 하던 애가 하나 있었던 것 같아.
국민학교 2학년때인가? 교실 뒤에서 애들이랑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녀석이 뒤에서 나를 꽉 끌어 안는 거야.
이거 못 놔! 하면서 악을 썼는데 그 녀석이 글쎄 놔줄 생각은 않고 더 세게 끌어 안데.
나는 얼굴이 빨게져서는 씩씩거리고 있는데 그녀석이 안은 채로 그러는거야.
귀여워 죽겠다고... 그걸 보고 애들이 얼마나 놀려 대던지.
나도 그때 학교 가기 정말 싫었거든.
근데 지금 생각하니 우습기도 하구 내게도 그런 때가 있었나 싶구 그러네."
 
"그래, 지나고 나면 다 추억이지 뭐."
 
그래, 그의 말처럼 그 모든 것이 다 추억이다. 추억속의 그리움이다.
남편과 생태찌개를 마주하며 서로의 어릴적 짝사랑 이야기를 나누던
오늘의 기억도 언젠가는 추억속의 그리움이 되겠지.
그리고 힘들어하는 그에게 힘내라는 한마디를 하면서 친구처럼 늙어 가는 우리도
그 먼먼 훗날에는 추억속의 그리움으로 남아 있겠다.
 
'개똥아, 우리 그때까지만, 딱 그때까지만 괴롭고 힘들더라도
서로를 의지하며 친구처럼 살아가지 않으려나?
비록 미약한 힘이지만 내가 힘이 돼 줄게 너무 의기소침해 하지 말구 힘내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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