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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낙엽처럼/2007

전투적인 기도

by 서 련 2007.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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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y of the day  2007/09/10 (월) 21:35





스물 여덟...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애를 하나 덜컥 낳았지.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얼굴을 봤는데... 조그마한 것이 정말 하얗더군.
4킬로가 넘게 태어난 아이라 쪼글쪼글 한 구석도 하나 없고...
정말 하얗고 조그마한 고깃덩이가 꼬물거리는 거다.
내가 뭘 하긴 한 것 같은데... 정말 저 아이가 내가 낳은 건지도 실감나지 않고 마냥 신기하기만 했지.
근데 신기한 것도 잠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 했다.
모유수유가 좋다고 해서 아이에게 젖을 물렸었는데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처음 한 달 간 나는 아파서 울고 애는 배고파서 울고...
그야말로 전쟁이었지.
 
난 모유수유가 그렇게 힘든 건지 그때 처음 알았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 보름 내지는 한달을 참아내질 못해 모유수유를 포기하는 엄마들이 많다더군.
그당시 애아빠는 늘 술에 취해 있지, 애는 맨날 울기만 하지...
어쨌든 너무너무 힘들어서 급기야 애까지 귀찮아졌다.
이것도 나중에 안 사실인데 이런 걸 산후 우울증이라고 하더군.
백일도 안 된 애를 업고 파출소에 널부러져 있는 남편을 찾으러 가던 그 날 밤은...
정말이지 그대로 옥상으로 올라가서 아이 엎은채로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때부터인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깨끗한 물 한 사발 떠 놓고 자기 췌면을 시작한 것이...
"나는 누구보다 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 거야, 이제는 제발 흔들리지 말자." 기타등등...
그러고 났더니 마음이 좀 가라 앉더란 것이다.
 
그 후부터 아이가 초등학생이 된 지금까지 줄곧 아침에 물 한 그릇 떠 놓고
자기 췌면을 거는 일이 습관처럼 굳어져 버렸다.
처음에는 작은 옹기에 물을 떠 놓기 시작했었는데 이집으로 이사와서부터는
사진 속의 커피잔이 우리집 정수기 위에서 정안수를 자처하고 성스럽게 앉아
새벽마다 행해지는 혼자만의 다짐을 지켜봐주고 있다.
혼자만의 의식, 그 속에서 행해지는 혼자만의 다짐...
 
종교가 없던 터라 그것을 딱히 기도라고 생각하며 살진 않았었는데
오늘 문득 생각해보니...
나는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실제로 기도를 하며 그렇게 살았던 거였다.
"~ 하게 해 주세요" 라는 의존적인 기도가 아닌 "~을 하고야 말겠어!" 라는 주체적이고 전투적인 기도...
 
나는 오늘도 기도를 한다.
이젠 제발 옆길로 빠지지 말고 한 길을, '正道'를 걷자! 라는
마땅히 들어 행해져야만 할, 의무감 들게 하는 전투적인 기도를...

(2005/05/26: 뱀딸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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