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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낙엽처럼/2011

등나무 아래서 삽겹살을 굽다.

by 서 련 2011.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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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댁 등나무 아래에는 얼마 전에 남편이 친구한테서 얻어온 업소용 테이블이 하나 있다.
스텐으로 된 둥근 테이블은 가운데에 숯을 넣어 고기를 구울 수 있게끔 만들어져 있었다.

고기도 잘 먹지 않는 사람이 어쩐 일인지 그 테이블만 보면
거기에 앉아 삼겹살이라도 구워 먹어야 하지 않겠냐는 소릴했다.

하긴 남편은 늘 그렇게 말하는 버릇이 있다.
창고에 넣어둔 낚시 가방을 볼 때면 '이 걸 가지고 낚시 한 번 가야 하는데...' 그랬고
침대 밑에 넣어둔 텐트를 볼 때도 '이 걸 가지고 야영 한 번 가야 하는데..' 그랬다.

하지만 어제는 무슨 바람이 불었던지 그 테이블에서 고기를 구워 먹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침대 밑에 처박아 놨던 텐트도 주섬주섬 꺼내는데...

"뭐, 남사 마당에서 야영하게?"
"아니, **이가 빌려 달라고 해서..."

남편은 친구에게 텐트를 빌려 주면서 그동안 자신이 무심코  내뱉은 무수한 말들에 대해
일종의 책임감 같은 것을 느꼈었나 보다.
아니 무심코 내뱉은 무수한 말들에 대한 책임감이었다기보다는
텐트나 탁자를 사용해 줘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남편의 그런 사물에 대한 의무감은 마누라인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싶다.

쓸데없이 집안 정리를 너무 자주 하는 마누라인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이거 쓸 거야? 언제 쓸 거야? 안 쓰면 누구 주면 안 돼? 라고 묻는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는 물건은 더 이상 물건이 아니고 짐일 뿐이라는 마누라인 나의 역설은
남편에게 일종의 강박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얼마 전에도 나는 시댁 마당을 정리하면서 등나무 밑에 자리한 업소용 테이블을 가리키며
저 거 쓸 거야? 그랬다.

"그러게... 고기 한 번 구워 먹어야 하는데.... 아이 참...."

안 쓰면 어때? 그냥 거기 놔두면 어때?라고 할 법도 한데
착한 것인지 생각이 없는 것인지... 남편은 꼬박꼬박 의무감 섞인 발언을 한다.
그러다가 어제는 드디어 남편이 삼겹살 두 근이라는 칼을 뽑았다.

삼겹살 두 근을 사들고 시댁에 갔었다.
남편이 테이블을 닦고 숯불을 피우고 불판에 호일을 깔아 고기 구울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텃밭에서 오이를 따고 상추와 치커리, 아욱을 뜯어 점심상을 차렸다.

쌀을 씻어 밥솥에 앉혀두고 텃밭에서 따온 오이는 양파랑 채를 썰어 고춧가루 조금 넣고 새콤달콤하게 무쳐냈다.
아욱은 풀물이 나올 때까지 바락바락 주물러 된장 풀어 아욱 된장국을 끓이고
상추와 치커리는 깨끗이 씻어 건져 커다란 접시에 다소곳이 담아냈다.

청양고추, 마늘을 잘게 썰어 접시에 담고, 양념장을 만들어 접시에 담고,
김치냉장고에서 살얼음이 약간 낀 김치를 꺼내 썰어 접시에 담았다.

등나무 아래에서 남편은 삼겹살을 열심히 굽고 나는 반찬을, 밥을, 국을 그 등나무 아래 테이블 위로 열심히 날랐다.
그리고 내 아이와 내 아이의 할아버지는 그 테이블에 앉아 잘 구워진 삼겹살을
상추와 치커리 위에 올려 쌈을 싸서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이글거리는 불판 위의 삼겹살을 잘게 잘라 아버님 앞접시에 한 점 올리고 딸아이 앞접시에 한 점 올리던 시간에
정오의 태양은 우리의 정수리 위에서 불판 아래 숯불처럼 이글거리고 있었지만
그늘이 깊은 등나무가 있어 걱정이 없었다.

그 깊은 그늘에서 나는 들판을 바라보았다.
초록빛이 찬란하게 부서지는 정오의 들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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