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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낙엽처럼/2011

구토

by 서 련 2011.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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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서둘러 학교에 보내 놓고 다시 따뜻한 잠자리로 파고 들어 책을 본다.
1992년 2월에 번역되어 출간된 정가 3500원짜리 프랑스 소설...
책은 곧 스무살이 되어가고 누렇게 곰삭은 헌 책 냄새를 풍겼다.
번역과 동시에 사라져버린 작가 특유의 문체 대신 지루하고 딱딱한 서술이 펼쳐졌다.
1930년대의 프랑스 문화와 프랑스말을 알지 못하는 이상
아무리 책을 읽어도 사르트르의 본질에는 도달할 수 없다는 의구심이 자꾸만 고개를 쳐들어 독서에 집중을 할 수 없다.
또 갈등이 시작되었다.

언제부턴가 번역이 된 소설을 읽으면 이런 갈등 때문에 독서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번역자를 못 믿어서라기 보다는 애초부터 드리워진 이해의 장벽이 거슬렸던 것이다. 
차라리 책장을 들추며 내 스무살 무렵의 흔적들을 찾으며 애상에 잠기는 편이 훨씬 생산적인 것일지도.
그러나 책장을 또 넘긴다.

"나는 이제 알았다. 사물이란 순전히 보이는 그대로의 사물인 것이다.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라는 문장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

스무살 무렵의 내가 사르트르가 말하는 구토감의 정의를 찾기 위해 소설을 읽었던 흔적이다.
지금 보니 읽었다기 보다 그것은 거의 필사적인 파헤침에 가깝지 않았나 싶다.
무엇을 알려고 그렇게 발버둥을 쳤던 것일까?

문장 하나 하나에 그 시절의 기억이 밑줄처럼 켜켜이 쌓여있다.
그 시절 나는 생각하는 존재자로 자유롭고 싶었다.
그랬으나 지금 나는 생각이 아닌 걱정만을 끌어 안고 있는, 걱정에 사로잡힌 아줌마다.

걱정은 불안의 산물. 내 자유는 일찌감치 불안이 잠식해버렸고 
나는 그런 불안으로부터 분리되지 못한 채 점점더 많은 걱정을 스스로 꾸역꾸역 삼키고 있었다.
삼키고 삼켜도 뱃속에서 소화되지 않을 걱정 덩어리들! 이젠 토하고 싶다.

"내가 있었잖아. 나! 걱정이 아닌 생각을 할 줄 아는 자유로운 존재자. 어때 그 어떤 끈적한 구토감이 들지 않아?"

그래! 토해버리는 거다. 시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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