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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않아 생을 향한 속삭임 2008/01/30 (수) 21:15 아이와 함께 나선 산책길, 바람은 여전히 옷깃을 여미게 하고 햇살은 하늘로부터 눈부셨으나 열기가 없다. 무심코 눈을 돌린 그늘진 소나무 밑둥치엔 잔설이 하얗게 삼각지대를 이루고 있고 그 옆을 정신없이 오가던 청솔모의 손엔 등산객이 던져주고 갔을 법한 과자 부스러기가 들려있다. 경사가 사나운 비탈길에서 아이를 앞에 세우고 아이의 허리춤을 쥔 나는 아이를 밀며 숨가쁘게 정상에 올랐다. 그 곳에서도 바람은 매서웠고 하늘로 부터 쏟아지는 햇살은 여전히 열기가 없었다. 후두를 타고 허파로 몰려 들어간 매서운 바람이 탄산수처럼 가슴속을 짜르르하고 파고들 때 열기 없이 쏟아지던 햇살에서 향기가 날렸다. 저 멀리 산 너머 남녘으로 부터 밀려 왔을 법한 희미한 향기.. 2008. 1. 30.
고요 생을 향한 속삭임 2008/01/23 (수) 05:37 며칠간 눈은 쉴 새 없이 내렸으나 쌓이지는 않았다. 마른 땅을 뚫고 눈은 사라지고 두통같은 현실 위에 내려 앉은 새벽은 정적만이 고요하다. 고요하다. 2008. 1. 22.
뾰루지 생을 향한 속삭임 2008/01/16 (수) 10:12 왼쪽 볼에 7개, 오른 쪽 뺨에 2개, 모두 9개의 뾰로지를 면봉으로 짜 낸 후의 얼굴은 더 이상 얼굴일 수 없다. "얼굴이 왜 그래?" 뾰로지 자국으로 뒤덥힌 얼굴을 보며 그가 물었다. "죽을 때가 다 됐나 봐." 그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옆에 있던 그의 딸이 내 다리를 붙잡으며 죽으면 안된다고 울부짓는다. "엄마가 농담한 거야 울지마 아가..." 아이가 울음을 그치자 "병원에 좀 가 봐."라고 그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괜찮아, 연고 바르고 며칠 있으면 다 나아."라고 말했다. 다시 내 얼굴을 가만 들어다 보던 그가 말했다. "피부과 말고 내과..." 그래야 할까? 그래야 겠지? 그런데... 쪼매 겁난다. 2008. 1. 16.
갇히다 생을 향한 속삭임 2008/01/28 (월) 13:10 신랑이 출근하기 직전에 누군가 현관문을 열심히 두드렸다. 현관문이 열리자 말자 윗층 할아버지가 불쑥 열쇠를 건네주면서 "새댁, 내가 우리 애보다 집에 늦게 올것 같아서 그러는데 열쇠 좀 맡아 줘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얼결에 "예, 그럴게요 할아버지." 라고 대답하고는 열쇠를 받아 두긴 했는데... 아이랑 산책을 가려다가 생각해보니 윗층 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그 "애"가 언제 올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른 오후에 돌아 올지 아니면 늦은 오후에 돌아 올지, 그것도 아니면 저녁 늦게야 돌아 올지 최소한 그것만이라도 물어 봤다면 무턱대고 이렇게 기다리지 않아도 될텐데 말이지... 얼결에 나는 집에 갇히고 말았다. 에히... 미련 곰탱.. 2008. 1. 8.
발크레시티 생을 향한 속삭임 2008/01/08 (화) 20:58 대형 롤 화장지의 심지 4개를 이어 다리를 만들고 그 위에 하나 더 얹어 몸통을 만든 다음 치약 상자 두개로 팔을 만들고 풍선으로 머리를 만든 로보트가 있었다. 아이가 재활용 쓰레기로 손수 만든 로보트는 '발크레시티"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발크레시티는 투명 테이프로 엉성하게 붙여 놓아 옮길 때마다 팔다리가 한번씩 떨어져 나갔다. 그럴때마다 아이는 "걱정마, 발크레시티, 내가 안아프게 붙여 줄게." 하며 투명테이프를 찾아 정성껏 붙여 놓는 것이다. 주산공부를 하러 학교에 갈때에도, 논술공부를 하러 학교에 갈때에도, 아이는 "엄마, 발크레시티 버리면 안 돼?" 하며 내게 신신당부를 하곤 했다. 나는 아이가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돌아 올 동안 주로 청소를.. 2008. 1. 8.
2007/11/정호승-허물 허물 느티나무 둥치에 매미 허물이 붙어 있다 바람이 불어도 꼼짝도 하지 않고 착 달라붙어 있다 나는 허물을 떼려고 손에 힘을 주었다 순간 죽어 있는 줄 알았던 허물이 갑자기 몸에 힘을 주었다 내가 힘을 주면 줄수록 허물의 발이 느티나무에 더 착 달라붙었다 허물은 허물을 벗고 날아간 어린 매미를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허물이 없으면 매미의 노래도 사라진다고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허물의 힘에 놀라 슬며시 손을 때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보았다 팔순의 어머니가 무릎을 곧추세우고 걸레가 되어 마루를 닦는다 어머니는 나의 허물이다 어머니가 안간힘을 쓰며 아직 느티나무 둥치에 붙어 있는 까닭은 아들이라는 매미 때문이다 정호승 오랜만에 詩集이란 걸 구입했다. (주)창비에서 발행한.. 2007. 11. 22.
생을 향한 완벽한 긍정만이 정녕 나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생(生)을 향한 완벽한 긍정만이 정녕 나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서 련이 말하는 생(生)이란? "존재는 곧 생(生)이며, 생은 또한 생성(生成)이고, 존재자는 끊임없이 생성하는 것이다."라는 가정이 있을때 생(生)은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과정, 즉, 끊임 없는 생성의 과정을 의미한다. 완벽한 긍정이란 무엇인가? 모든 부정적인 것들, 그러니까 비도덕적이고, 비규범적이고, 비합법적인 모든 것들까지도 긍정하라는 말일까? 자신을 넘어서는 끊임없는 생성의 과정, 즉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이상, 가치)가 사회규범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에서, 그러니까 도덕적이고(혹은 윤리적이고), 규범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에 의해 추구 되어야만 한다는 의미로 완벽한 긍정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즉, 완벽한 긍정이란 '모든 규범적이고.. 2007. 9. 22.
2007/04/05/헤르만 헤세 - 방랑 - 방랑 - 슬퍼하지 마라, 머지 않아 밤이 온다 그 때 우리는 창백한 들판을 넘어 싸늘한 달의 미소를 보게 될 것이고 손과 손을 마주 잡고 쉬게 되리라 슬퍼하지 말아라, 머지 않아 때가 온다 그때 우리는 안식하며 우리 십자가는 해 맑은 길섶에 나란히 서게 되고 그 위에 비 오고 눈이 내리리라 그리고 바람이 불어 오고 또 가리라 - 헤르만 헤세 - 창가로 쏟아지는 햇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헤세의 방랑이 어렴풋이 떠올랐지. 싸늘한 달의 미소, 해맑은 길섶위에 나란히 서게되는 우리의 십자가를 떠올리면서 머지 않아 밤이 오고, 머지 않아 때가 오니 슬퍼 말란다. 수도승의 초연(超然)한 모습을 닮은 헤세의 속삭임이 오늘따라 내게 위안을 주는 이유는 아마도 창가로 쏟아지는 햇살 때문이지 싶다. 2007. 9. 22.
유종지미 Memory of the day 2007/12/24 (월) 16:48 동네가 떠나가라 엄마를 부르며 집으로 들어오는 아이의 손에는 달력이 하나 들려 있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랑 만든 DIY 달력. 점토공예 시간에 만든 작은 액자 소품도 하나 더 들려 있었다. 책가방에 실내화 가방 그리고 수업시간에 만든 달력이랑 점토공예 시간에 만든 액자... 그 많은 것을 잊어버리지도 않고 용캐 잘도 챙겨 온 아이가 문득 낯설었다. 얼마전 기말고사를 치르고 아이 담임한테서 전화가 왔었다. 아이 시험 성적을 보고 많이 실망하지 않았냐는 전화였다. 학년 평균 점수를 한참이나 밑도는 점수였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씩씩하게 말을 했다. 그리고 방학 동안 나름대로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 줄 계획이라고 말을 했다. 사실 점.. 2007. 9. 21.
저녁 한 때 Memory of the day 2007/12/23 (일) 19:06 지름 30센티미터 정도의 분홍색 플라스틱 링과 지름 10센티미터정도의 작은 공을 손에 쥔 아이가 아빠를 부른다. "아빠, 이거 받아 보세요." 아이의 아빠는 말없이 티비 브라운관만을 응시한다. "아빠, 이것 좀 받아 보라니까요?" 아이는 장난감 링을 자신의 아빠에게 건네며 놀아 줄 것을 강요한다. "아빠는 TV 볼꺼야." "내가 재미있게 놀아 줄게요." "에이 정마~알... 왜 이렇게 아빠를 괴롭히는 거시야아?" "아니예요, 아빠를 괴롭히려고 그러는건 절대로 아니예요. 아빠랑 놀아 줄려고 그러는 거라니까요? 아빠아~~" 플라스틱 링과 공을 손에 쥔 채, 한참을 조르던 아이는 아빠와 놀 것을 포기하고 혼자 놀기 시작한다. 설거지를 하며 .. 2007. 9. 21.
인터넷 TV Memory of the day 2007/12/18 (화) 06:10 다시는 사랑도 이별도 안하려고 두 손이 두 눈을 가려봐도....♬ 아이를 학교에 보내놓고 얼마 되지 않아 휴대폰 벨이 울렸다. '나쁘지 않아...' 이삼일 전에 바꾼 휴대폰 벨소리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그랬는지 단말기 액정에 발신자 번호를 확인도 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역시나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정형화 되고 단정하고 깨끗하고 밝은 텔레마켓터의 음성이었다. 전에 같으면 더 들어 볼 것도 없이 바쁘다는 핑개를 대며 곧바로 전화를 끊었을 텐데... 벨소리때문이었는지 아님 무겁게 누르던 일이 끝난 다음에 밀려든 여유때문이었는지 나는 애써 전화를 끊으려고 하지 않고 상대편의 말에 귀를 귀울였다. 내가 사용하고 있.. 2007. 9. 21.
맥주잔 Memory of the day 2007/12/14 (금) 16:48 종일 설거지통에 쌓아둔 그릇을 좀 전에 말끔히 씻었다.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면 간혹 그릇을 깨는 일이 있지.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집안 일을 하기 싫을 때 설거지를 하면 꼭 뭘 하나 깨먹는다는 징크스가 있다. 오늘도 정확히 적중하는 나의 징크스. 일전엔 큼직한 내열냄비 뚜껑을 하나 왕창 해먹었는데... 오늘은 남편이 애용하는 맥주잔을 해먹었다. 집엔 저것보다 더 고급스런 맥주잔이 여러 개 있는데 남편은 유독 저 멋대가리 없는 유리잔을 사랑한다. 저 잔이 아니면 맥주 마시는 걸 포기 할 정도로 애착을 가지는 235ml의 밋밋한 맥주잔. 폭이 좁아 씻기도 불편하고 심심하면 손아귀에서 탈출하는 235ml의 뺀질이 맥주잔. 뺀질거렸으.. 2007.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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